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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박해일의 이순신 '한산'

by jinsit 2022. 10. 1.

이순신은 대한민국의 명장중 하나이며, 세계해전사에 유래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장수로 유명하다. 최근에 영화-한산을 통하여 견내량대첩이라고도 하는 한산도대첩에 대해 재조명이 되었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볼때마다 국뽕이 차오르는 느낌과, 완벽한 전술로 적을 압도하는 모습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릴만큼 시원하다.

 

영화를 보면서 이것저것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기록을 남겨본다.

한산도대첩과 인물들 중심으로 보고자 한다.

 

1. 한산도 대첩이란?

 이순신의 제 8차해전으로 한산해전이라고도 한다. 전투명은 한산도 대첩으로 굳어지긴 했는데, 그 당시에는 한산 해전이 아니라 견내량 해전으로 불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산도를 기점으로 전투를 한것이 아니고, 견내량쪽에 정박중인 일본군을 유인하여 한산 앞바다에서 물리친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산이라는 이름은 섬에 큰 산이 있다는 데에서 한뫼라고 부르던 것이 한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여기서 학익진을 설명하자면, 진법의 일종으로, 학 날개를 펴는 모양을 진으로 응용하여 만든 것이다. 말 그대로 상대를 원을 그려가면서 둘러싸는 형태이다.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했다는 말은 학익진을 해군에서 최초로 적용시켰다는 말이다. 이 진은 육전에서는 대형을 횡렬로 형성하는 일자진의 형태이다. 해전에서는 단순한 학익진보다는 초승달 형태의 어린학익진을 쓰게 되어 있고, 실제로도 이순신은 어린학익진을 사용했다. 다만 그 진법이 학익진과 비슷하므로 모든 사료에서 학익진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으로는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서 물리칠 계획을 세웠다. 먼저 3~4척이 일본군을 공격해서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한 것이다. 결국 유인해낸 적을 상대로 학익진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고,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전투의 결과는 47척을 분파했고, 12척을 나포하였다 

 

학익진(출처:나무위키)

 

2. 이순신에 대해서

우리나라 대표위인으로 어린시절 위인전을 통해서 많이 접해봤을 것이다. 

일생을 간단히 보자면 1545년(명종 즉위)에 태어나 1598년(선조 31)에 사망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것은, 가장 유명한 일화이자 어록중의 하나일 것이다. 16세기 조선의 무신이자 영웅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을 이끌었던 해군제독으로 보면 된다. (10만원짜리 지폐가 나온다면 무조건 이순신이 들어가야한다. 현재 100원 짜리가 아니라..)

 이순신은 상당히 관직에 늦게 나아갔다. 28세에 무과에 응시하여 낙마로 낙방하였는데, 들리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시험장 안에서 자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로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속개했으나 탈락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시 이때이후로 4년이 지나 32세가 되던 1576년 4월이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권지란 임시직 또는 실습생의 의미인데, 일종의 간부 기초 교육 과정을 이행한걸로 보인다. 그해 12월에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하여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 장교로 본격적인 무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1591년 47세로 정3품인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조선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 비슷한 속도였다.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일어 날수 없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전술가로서 가져야만 하는 모든 덕목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우월한 정보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싸웠다. 일단 전투에 들어서면 아군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적의 장점은 무력화시키는 전술로 적의 피해를 극대화했다. 명장들이 종종 보이곤 하는 호전성이나 아집, 전공 욕심도없어 항상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또한 이런 전략전술을 실제로 실행한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직접 만들어내다시피한 군대와 다름없었다.

영화 한산 포스터

3. 원균에 대해서

2번의 이순신과 대비되는 인물이 바로 원균이다.

한산 영화에서 원균은 손현주가 연기했는데, 원균을 연기하는 것은 배우 이미지에 손상이 올정도로 조선사를 보게 되면 원균이 얼마나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무위키에서도 원균에 대해 평하기를,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장수이고 나라를 두번이나 위기로 몰아넣은 대역죄인이라고 평하고 있다. 마치 을사5적처럼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과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이때 이미 일본에 식민지로 점령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균은 조선시대 경상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좌병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540년(중종 35)에 태어나 1597년(선조 30)에 사망했다.

전투일지를 간추린다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사 1만명을 모두 해산시키고, 판옥선 4척만 남기고 약 70척을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이순신을 모함하여 몰아내고, 재직중 부하의 아내를 강간했다. 또한 날마다 음식을 과도하게 먹어 군량과 고기, 생선등을 전부 거덜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장수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병법에도 무지하고 적을 앞에두고도 출전하지 않아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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