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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고난의 순간, 왜 침묵하십니까 '사일런스(silence)'

by jinsit 2022. 11. 12.

영화 : 사일런스(Silence)

 

개봉: 2017/02/28

장르: 드라마

국가: 이탈리아, 멕시코, 미국

시간: 159분

감독: 마틴 스콜세지

원작: 엔도 슈사쿠

 

  이 영화는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沈)”을 바탕으로, 역사상의 실존인물 ‘페레이라 크리스토반 신부(1580~1652)’의 배교사건을 중심으로, 일본에서의 기독교 박해(迫害)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탄압에 있어 배교를 감행하기 위해 여러 끔찍한 고문방법을 동원했으며 신앙과 인간의 생명 앞에 어떠한 결정을 해야 할 것인지, 침묵하는 신에 대한 믿음과 그 앞에서 신앙을 지켜내고자 하는 신앙인들의 처절한 모습을 잘 그려져 있다. 

 

 

사일런스 공식 스틸컷

1. 시대적 배경

  일본의 기독교는 1549년 예수회 설립자의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사비엘’이 일본 규슈지방의 가고시마에 첫발을 내디딤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예수회 수도사 두 사람과 일본인 통역 한 사람을 데리고 가고시마에 들어와 포교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일본 기독교 포교의 시초였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자신의 통일 정책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지고, 10년 후인 1597년 2월 일본인과 유럽인 26명이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포교의 기세가 꺾이는가 싶었지만 포교 활동은 조심스레 진행되었다. 이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인 기독교인들이 외국인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어갔다. 처형 방법으로 화형(火刑)을 택했지만 신앙인들은 육체가 불타 죽기 전 성모 마리아를 칭송하는 외침으로 순교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목적 달성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 많은 고문 방법을 고안해 냈다. 당시는 십자가형, 화형, 수책, 물고문 등의 처형방법이 있었으니 배교하는 선교사를 한명도 얻지 못했기에 고안해 낸 방법이 ‘구덩이 매달기’였다. 깊이 판 구덩이에 오물을 넣고 그 위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죽는 시간을 연장시키기 위해 이마나 귀 뒤를 칼로 작은 상처를 내어 피가 조금씩 흐르게 하는 방법으로 고통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강인한 사람 중에는 일주일 이상이나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도 했는데, 이러한 고문 방법에도 신앙인의 씨는 마르지 않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고문과 처형으로 순교를 택했다고 한다. 이는 은밀하게 신앙을 지켜온 ‘가쿠레키리시탄(숨겨진 기독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원작의 “침묵”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탄생, 이를 작품화한 것이 영화 “사일런스”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신부가 곧 ‘페레이아’ 신부였다.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었던 페레이아의 배교 소식은 로마 교황청 뿐 아니라, 전 유럽 가톨릭 성직자들의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되었다. 유능한 성직자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내기에 충분했고 이를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제 두 명(로드리게스와 가르페)이 스승을 찾아 이를 확인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떠나게 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출처: 미들뻔 유투브 채널
출처: 미들뻔 유투브 채널

 

 

2. 영화 줄거리

   (1) 페리이다 신부의 배교

 1640년 5월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인 ‘로드리게스’는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교를 각오하고 ‘기치지로’란 일본인의 안내로 가고시마에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일본에 도착한 두 신부는 정부의 눈을 피해 조용한 곳에 숨어 공동체를 운영하며 자기들 보다 더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라게 된다. 두 신부는 밤에는 숨어있고 밤에만 마을 전체를 돌며 숨어있는 신자들을 돕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문은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고 자신을 안내해줬던 ‘기치지로’로부터 “자신은 성화 밟아(후미에:踏み) 신앙인임을 부인했고,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지 않는 자신의 가족들은 가마니에 쌓여 화형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혼자서만 목숨을 부지했었다”는 말을 듣는다.

  이윽고 이 마을에도 ‘기치지로’가 겪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성화를 밟는 것으로 ‘배교’와 ‘순교’를 정하고 성화를 밟지 못하면 배교의 뜻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에 부족함을 느끼고 십자가에 침을 뱉고 ‘성녀는 창녀다’라는 말을 외치라 강요한다.

성화를 밟고 침을 뱉지 못한 자들은 즉시 배교의 뜻이 없다고 판단해, 바닷가에 사흘씩 묶어놓고 맨몸으로 모진 파도를 맞아야하는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하나둘씩 죽어간다.

 

  결국 기치지로의 밀고로 ‘로드리게스 신부’도 체포되는데, 끌려간 곳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잡혀 있었다. ‘이노우에’라는 취조 심문관에게 취조를 받는다. 이노우에 수령은 배교를 하면 마을 사람들을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마을 사람들 대신 자신을 죽이라 말하는 신부, 하지만 순교하는 영광의 대가는 마을 사람들의 고통이라며 이노우에 수령은 사람들의 목숨을 볼모로 삼는다.

  그의 굳은 믿음에 마을 사람을 하나씩 불러내어 목을 베는 비열한 방법을 택하고. 바닷가에 데려가 그가 보는 앞에서 신도들의 손발을 묶어 그들을 강 가운데 수장시킨다. 자신과 함께 일본에 왔던 ‘가르페 신부’역시 그들을 따라 수장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가장 존경해왔던 ‘페레이아’신부를 만나게 되고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한 것이 바로 구덩이에 거꾸로 매다는 이 끔찍한 고문과 무고한 일본인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음하며 죽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배교는 본인의 고통의 문제가 아닌, 다른 신자들의 고문과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배교였음을 알게 된다. 주님의 얼굴을 밟아 여러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주님이 원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2) 고통의 순간에 침묵하는 신

  페레이라 신부는 로드리게네스 신부에게 자신이 배교한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배교한 것은,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 들은 저 신음소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했지만,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만일 로드리게네스 신부가 순교를 고집한다면 그 사이 무고한 신자가 한사람씩 목숨을 잃게 될 것이며, 배교한다면 저 불쌍한 신도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로드리게네스 신부에게 가장 길고 어두웠던 밤이 끝나갈 무렵, 마침내 신부는 성화 앞에 섰고 목판속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나를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짓밟히기 위해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영화 공식 포스터

 

3. 고난의 순간에서 만나게 된 신

 영화의 모티브가 된 작품 『침묵』을 통해 작가 ‘엔도’는 일본의 특수성을 ‘초월’과 ‘침묵’이라는 키워드로 질문을 하고 있다. 여기서 침묵은 초월적인 ‘신의 침묵’일 수도 있고, 초월에 대한 ‘일본인의 침묵’일 수도 있으나 거기에는 약함이라는 모티브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약함’은 부조리한 세계의 악과 고통에 침묵하는 초월적인 ‘신의 약함’과, 초월을 견디지 못하는 ‘일본인의 약함’이다. 작품에서 ‘기치지로’야말로 이런 일본인의 취약성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캐릭터라 생각한다.

 

  일본인의 사유방식 안에서는 모순되는 두 가지가 함께 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일본인에게 ‘침묵’의 반대는 때론 ‘약함’이 되기도 때로는 ‘강함’이 되기도 할 것이다.

 

  “침묵”이란 작품에서 ‘로드리게네스’는 감동적이고 웅장한 순교 장면을 상상했겠으나 성화를 밟은 후의 순교의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성을 목격하고 “머지않아 자신이 즉음을 당하는 날에도 세상은 지금과 조금도 다름없이, 아무 관계없이 흘러갈 것이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매미는 울고 파리도 윙윙 날아다니겠지.”라 말하고 있다.

 

 “순교자들을 집어삼킨 바다, 곧 아무 감동 없이 시체를 씻어 삼키는 바다,  항상 변함없이 펼쳐져 있는 침묵의 바다” 앞에서 ‘로드리게네스’ 신부는 하느님도 저 바다와 마찬가지로 침묵만 지키고 있다고 말하면서, “만약 하느님이 없다면 이 바다의 단조로움과 그 무서운 무감동을 어떻게 견디어낼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나가사키에 “침묵”의 작가 ‘엔도 문학관’이 세워져 있고, 맞은편 작은 언덕위에 자그마한 ‘침묵의 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바라본 넓고 푸른 바다는 너무나 평온해 보이지만 박해 당시에는 영화에서처럼 해안에 기둥을 세워 신도들을 묶어놓고 수형이 집행 되었던 곳이라 하니 고통의 바다가 아닐 수 없다. 너무나 잔잔했던 푸른 바다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인간이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푸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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