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詩)”
개봉: 2010.05.13
장르: 드라마
국가: 한국
시간: 139분
감독: 이창동
출연: 양미자(윤정희), 종욱(이다윗), 강 노인(김희라), 기범 아버지(안내상), 김용탁 시인(김용택), 조미혜(김혜정), 희진 어머니(박명신), 박상태(김종구) 등
1.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 처럼 살았던 배우 윤정희
오늘(2023.1.20), 영화배우 윤정희(손미자)씨가 향년 79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망소식을 접했다. 1967년 ‘청춘극장’ 데뷔 이후 300여편의 작품을 남긴 유명 여배우의 알츠하이머 투병상황은 가끔 매스컴을 통해 들어온 터이다. 더구나 병중에 가족들과의 불화설이 있었기에 그녀의 마지막 생의 쓸쓸함과 애석함이 더해지면서, 2010년 그녀가 출연한 ‘이창동 감독’의 “시”가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작품의 내용 역시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여 주인공(윤정희)이 기억을 붙잡기 위해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메모하고 글을 써간다는 이야기로, 당시 윤정희 배우의 상황과 닮아있다. 그녀 역시 ‘시’ 촬영 당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으면서 극중 알츠하이머 투병중인 ‘미자’역을 연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예술 영화로 2010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가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작품에는 치매를 앓아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名詞’, 그 다음 ‘動詞’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의 대사는 잊혀지지 않는 문장으로 남아있다. 치매가 언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작품에는 특히 실제 ‘김용택 시인’이 등장하고 있어 더욱 친근하다.
주인공 윤정희의 청초하고 고아한 자태의 잔상을 뒤로하고 이 영화를 끝으로 세상을 하직한 그녀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시”의 내용을 살펴본다.
2.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줄거리 및 결말정보
화면이 열리고 한강을 낀 어느 작은 마을. 졸졸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와 아이들의 말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아름다운 한강의 모습이다. 그리고 여자아이(희진)의 시체가 떠오르고 옆에 ‘시’라는 글자가 보이며 영화는 시작된다.
화면은 다시 어느 병원 대기실로 바뀌고, 양미자(윤정희)를 부르는 간호사의 안내로 의사와 마주한 미자는 의사에게 팔 저림을 호소한다. 어떤 것이 찡하고 통한 것 같은~~ , 이란 말을 흐리며 천장의 전구를 바라본다. 저 에너지~, 그 어떤 것은 ‘전기’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기가 통한 것 같은 팔 저림. 그리고 자신이 건망증이 와서 자주 말을 잊는다고 말한다. 그의 나이 66세. 의사는 팔 저림보다 더 급한 것이 단어를 잊는 것이라 전한다. 하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미자는 병원을 나오자마자 자식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건강이 평균치 이상임을 자랑한다.
그녀는 서민 아파트에 이혼한 딸이 떠맡긴 중학생 외손자와 단 둘이 생활하는, 중풍에 걸린 회장 할아버지의 간병일을 할 정도의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항상 흰 모자를 쓰고 예쁜 옷을 좋아하고 가끔은 엉뚱한 질문을 해는 캐릭터로 나이에 비해 들국화 같이 맑고 순수한 가녀린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시를 배우려 마을 문화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시인 김용탁(김용택)의 강의를 듣게 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보는 것’.
그녀는 모든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고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마치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주인공 미자의 모습은 치매 초기의 전조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어느 늦은 밤, 손자의 친구들이 다녀가고, 부모들 모인 곳에 그녀도 참석한다. 그리고 처음 화면에 보였던 여자아이의 시체는 자신의 손자와 그 친구들에게 성폭력을 당해 자살한 것으로 그것을 논의하는 가해자 자녀를 둔 부모들의 자리였던 것이다. 한참 논의 중에 그곳을 빠져나간 미자가 창 밖에서 꽃을 살피며 수첩에 뭔가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녀의 이상한 행동은 손자의 일로 인해 충격을 받은 그녀의 치매가 진전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해결책은 피해자 가족의 피해보상금 문제였고 돈을 마련할 길 없는 그녀는 평소 추근대던 간병일을 하는 중풍에 걸린 강 노인과의 육체관계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보상금을 마련한다.
아끼던 외손자에 대한 실망감과 죄책감에 이어 가해자 가족이 되어버린 자신의 복잡한 심정. 이 속에서 시상(詩想)을 찾아야 한다는 혼란과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외손자. 미자와 배드민턴을 치던 중 손자는 경찰에 끌려가고 미자는 자기 손자 때문에 죽은 여학생을 위한 시를 쓴다.
처음에 그녀가 ‘시상’을 찾았던 곳은 아름답고 깨끗한 것이었으나, 손자의 일로 가족의 죄를 인정하고부터는 세상의 더러움과 가족의 치부를 느끼고 이에 속죄하는 것으로 시상을 찾게 된다. 이는 김용탁 시인의 “시상은 스스로 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찾아야 하는 것”이라는 말에 기인한다.
그리고 여학생이 자살한 물위 난간에 서서 비를 맞아보기도 하고 자신을 추행하려 했던 강 노인을 찾아가 약을 먹이고 그와의 성관계를 통해 죽은 여학생을 이해해 보려 하지만 학생을 헤아리기는 어렵기만 하다. 이는 삶의 더러움과 추함과 고통을 통과한 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시를 쓸 수 있으며, 미자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을 통해 시가 그려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자가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는 단어와 문장 순으로 기억을 잃고, 시간이 지나면 인지구조 자체를 잊어버리는 병이다. 시를 쓸 수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시를 쓰려는 것이 주인공 미자의 시를 대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 미자가 그토록 믿고 사랑한 손자 정욱. 손자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던 손자에 대한 사랑은, 친분이 있는 경찰에게 손자를 고발함으로써 손자 스스로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었을 것이다. 미자는 죽은 여학생을 향한 속죄의 뜻이 담긴 시를 써내려 간다.
그리고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며 그 공포를 시로 위로 받고 있다. 이렇듯 ‘詩’는, 시로 인해 외로움을 극복해가는 아프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주인공 미자는 문화원 마지막 수업에 꽃다발과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 한편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아네스는 죽은 학생 ‘희진’을 가리키는 말로 희진의 노래였다. 김용탁 시인은 미자의 시를 읽어 내려간다. “그 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한가요. 저녘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생략)…. 전반부의 낭독은 미자가, 후반부의 시는 죽은 희진의 목소리로 바뀌며 영화는 끝이 난다.
3. 아프고 아름다운 아네스의 노래
이 영화는, 책임지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아이들, 가해자 부모들의 개념 없는 행동들을 질책하며 치매를 앓는 미자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책임지는 롤모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상업성이 배제된 영화를 제작하는 소신으로 내면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고자 한, 이창동 감독. 이제 “시인들은 시는 죽었다며 더 이상 시를 쓰려하지 않는다. 시를 쓸 수 없는 세상. 그럼에도 미자는 시를 쓰려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시를 쓸 수 없는 상황의 미자를 통해 이창동 감독은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영화가 죽어가는 시대에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고 한다. “균형과 다양함을 추구해야 할 영화계가 상업성을 쫓아 타성에 젖어버린 현실, 그로 인해 죽어가는 영화적 가치들”에 대한 탄식을 작품 속 미자를 통해 투영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 영화 끝부분에 수강생들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주제로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씬에서 대부분의 내용은 실제 해당 배우들의 사연이라고 하니 가슴 아픈 과거를 떠올리는 각자의 ‘시’들이 가슴저리게 다가온다.
오늘 배우는 떠났지만 작품 속 주인공으로 그녀를 만나면서 대사 하나하나가 ‘시’가 되어 우리 마음을 울리는 명 작품으로 길이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 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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